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3세 (문단 편집) == 생애 == [[펠리페 2세]]와 4번째 왕비 오스트리아의 안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펠리페 2세의 여동생 스페인의 마리아의 딸로 남편인 펠리페 2세에겐 외조카이기도 하다.]의 아들로 이복형 [[돈 카를로스]]와 3명의 친형이 모두 요절하면서 사실상 펠리페 2세의 유일한 아들로서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1598년]] [[9월 13일]]에 왕위에 올라 1601년에 [[의회]]를 [[바야돌리드]]로 옮겼다가 1606년에 다시 [[마드리드]]로 복귀시켰다. 1609년에 [[발렌시아(스페인)|발렌시아]]에서 [[모리스코 추방|모리스코(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안달루시아]], [[무르시아]], [[아라곤]], [[카탈루냐]], [[카스티야]]에서 차례로 모리스코를을 추방했다. 모리스코들을 추방한 이유는 이들의 개종이 진실하지 못하다 여겼고 지중해 연안에 나타나는 해적들이 모로인과 합세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추방당한 모리스코들은 북아프리카로 가서 [[해적]]에 합류했다. 즉 해적의 세력약화란 목적달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발렌시아에서 11만 7천명, 아라곤에서 6만 1천명이 추방되는 등 약 27만에 달하는 모리스코들이 추방되었다. 이 조치로 인해 [[발렌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노동력 부족 때문에 많은 마을들이 초토화되었고, 아라곤에서는 빠져나간 노동력을 프랑스에서 이주자들을 받아들여 해결했다. 하지만 30년 이상 추방 조치가 계속되다 보니 발렌시아는 계속해서 노동력이 부족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인]] [[교황]]을 2명 배출한 [[보르자 가문]]의 영지가 있는 곳이였는데, 피해가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면에서 펠리페 3세의 스페인은 [[오스만 제국]]과 계속 적대 관계였고 [[저지대 국가]]에서 벌어지는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중지하려고 했다. 부왕의 치세부터 시작된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국고의 손실이 심한 것이 이유였다. 결국 1609년에 12년 동안 휴전할 것을 조건으로 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한편으로 1603년까지 계속 싸웠던 [[잉글랜드 왕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와 협정을 맺어 평화를 정착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펠리페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편을 들어 참전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1621년에 병에 걸려 마드리드에서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들이나 아버지에 비해서 스페인 국내에서나, 대외적으로나 영 존재감이 없고 주목을 덜 받은 편이다. 아버지인 [[펠리페 2세]]야 성공한 군주로 평가하든, 실패한 군주로 평가하든 서유럽 다른 국가들의 동시대 최종보스이자 세계제국을 지휘하던 거대한 역사적 비중을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이 큰 군주였고, 아들인 [[펠리페 4세]]도 기존의 학계에서는 무능한 암군으로 보았으나, 근대에 들어와서 나름대로 [[스페인 제국]]의 노화를 확실하게 의식하고, [[가스파르 데 구스만|올리바레스 공작]]을 중심으로 대내외적으로 개혁과 고착 상황 탈피를 추구한 나름 생각은 있었고, 노력도 열심히 한 왕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펠리페 3세는 그러한 재평가도 없고, 아들이 선택한 정권의 파트너였던 올리바레스와 달리 펠리페 3세가 국정을 전임하고 가장 총애한 재상인 레르마 공작은 의욕이나 원대한 비전은 없는 주제에 탐욕은 가득했던 [[간신]]이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2세야 외부적 평가는 어쨌든간에 스페인 안에선 항상 위대한 군주로 대접받았고, 아들인 펠리페 4세는 존 헉스터블 엘리엇 경을 비롯한 20세기 영국 출신 스페인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본격적인 재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현대 근세 압스부르고 시대 관련 사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재주목하고 연구하는 시대가 펠리페 3세와 레르마의 치세인데 적어도 지금까지의 중론은 '재평가 하려고 해보았지만 역시 못난 왕 맞더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